오래전에 쓴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우연히 찾았습니다. 마침 좋은생각 생활문예대상 공모전이 있다고 해서 아무 생각없이 응모를 해보았는데 입선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좀 더 다듬고 신경써서 응모할걸 후회도 되지만 필력이 많이 부족한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수상의 영광을 주신 좋은생각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제목 : 아버지와 손수레
대부분 어린아이들의 우상은 아버지이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린 시절 우리 아버지는 양팔에 나와 누나를 들고 팔 그네를 태워주실 만큼 힘도 세고 키도 크셨다.
아버지의 직업은 시장에서 상인들의 물건을 손수레로 배달 해 주는 일을 하셨다. 늘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손수레를 끌고 40분정도의 거리에 있는 시장으로 향하셨다. 그리고 오후 2시면 손수레 한편에 막걸리 한 병을 싣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혼자 동내를 다닐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매일 오후 2시가 되면 동네어귀에 앉아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저 멀리 언덕위로 태양빛을 뒤로하고 다가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면 가슴 벅차는 반가움으로 아버지께 달려갔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부자의 상봉이었지만 늘 거창한 상봉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꼭 안아 주시며 술냄새, 담배냄새, 땀냄새가 절묘하게 썩인 거친 얼굴로 내 얼굴을 비비며 사정없이 뽀뽀를 해주셨다. 냄새 나고 거친 수염 때문에 따가웠지만 아버지라서 싫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내 손에 쥐여주시고 나를 번쩍 들어 손수레에 태워 주셨다. 아버지의 손수레를 타고 동네에 들어오면 나는 스타가 된다. 동내 아이들은 손수레를 타고 있는 나를 부러워했고, 나는 인심이라도 쓰듯이 아이들을 아버지의 손수레에 태워주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기구라도 탄 듯이 함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아버지께서는 일부러 동내를 멀리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돌아오셨다.
여러 해가 바뀌었고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갈수록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고 몇 개월 후에 아버지는 2번씩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고 한다. 말이 어눌하고, 아무 때나 웃음이 터지거나, 갑자기 화를 내시는 이유를 그제서야 조금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아버지를 마중 나가지 않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내 키가 아버지만큼 컸다. 아버지의 무능력함이 초라해 보였고, 가난한 생활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엄마가 만들어 준 고무줄바지를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가정생활도 너무 싫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버지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시내에 나가면 햇빛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시는 아버지와 자주 마주치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아버지를 모르는 척 외면하기도 했고, 분명히 눈이 마주쳤지만 도망간 적도 있었다.
건강이 좋지 못했던 아버지는 내가 실업계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빨리 집안 생활에 보탬이 되길 바라셨지만 나에게도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고 비교적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기에 서운해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뒤로한 채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그날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시며 술을 드시고 눈물까지 흘리셨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첫 중간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그날도 만원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던 중 대전역 앞을 지나가던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버스기사의 심한 욕설이 들려왔다. 궁금한 마음이 들어서 버스 앞쪽으로 이동해 확인을 해보았더니, 도로를 무단 횡단하려던 손수레가 있었고, 손수레에 실려있던 짐이 도로위로 쏟아져 내려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었다. 운전기사는 계속해서 클랙슨을 울리며 욕설을 퍼부었고, 보다 못한 몇 명의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 물건 정리를 도와주었다.
나는 만원버스 안에서 고개를 숙인 체 눈물을 쏟아내었다. 버스 앞 도로 위에서 당황하며 허둥지둥 하시던 내 아버지의 모습과 그 눈빛이 내 마음을 아프게 찌르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했지만 나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대학이라는 꿈을 포기했고, 친구들 대학교 갈 때 나는 직업훈련 교육을 받고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세상풍파 속에서 30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지금도 집 한편에는 오래 된 아버지의 손수레가 녹슬고, 구멍 나고, 타이어 바람도 빠져서 사용할 수 없는 고철로 외롭게 서있다.
오늘따라 아버지의 낡은 손수레가 고달픈 세월을 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은 귀도 안 들리시고, 잘 걷지도 못하시고, 여기저기 병들고 아픈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어린 시절 그토록 멋지고 위대해 보였던 아버지의 모습이 다시금 그려진다.
아버지 옆에 슬그머니 누워본다. 아버지라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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